
블라디미르: “그럼 갈까?”
에스트라공: “가자.”
(그러나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 사뮈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결말 중에서
솔직히 처음 책장을 넘겼을 땐 좀 ‘엥?’ 했다.
연극 무대에서 배우들의 침묵과 공기를 눈앞에서 보며 접했다면 시작부터 “오… 꽤 심오한데?” 하며 여운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활자로만 읽어 내려가다 보니, 뜬금없는 대사들의 나열에 “아니 이게 대체 뭐야 ㅋㅋㅋ” 하며 띠용했던 게 솔직한 첫 느낌이었다.
그래서 도대체 이게 무슨 작품인가 조사를 좀 해보고 나서야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이른바 ‘부조리극(Theatre of the Absurd)’.
이치에 맞지도 않고, 개연성도 없는 헛소리와 바보 같은 만담의 연속. 그런데 그 공허하고 허무한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다 보니 문득 서늘한 질문 하나가 가슴에 쿵 하고 내려앉았다.
“어쩌면 우리네 삶에도 이런 이치에 안 맞는 허무하고 바보 같은 모습들이 가득하지 않은가?”
‘함께할 바보’와 파멸의 회피
절대로 오지 않을 이상향을 기다리며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아쉬워하고, 목매고, 서로 착취하고 착취당하는 것. 그것이 어쩌면 우리 인간들의 삶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책을 읽는 내내 한편으로는 철학자 니체가 떠올랐다.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초인이 되기 위해, 혹은 누군가가 초인이 되어 자신을 구원해 주기를 바라다가 끝내 미쳐서 생을 마감했던 니체의 비극이 겹쳐 보였다.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고도’가 있지 않을까.
완벽한 배우자, 흠결 없이 온전해진 나 자신, 이상적인 일터와 제도, 혹은 손에 잡히지 않는 영원한 행복감. 우리는 당연히 이루어지지 않을 각자만의 고도를 목 빠지게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도는 끝내 오지 않을 것임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면서도, 막상 이 자리를 박차고 떠나기엔 너무나 아쉽고 두려워서 기어코 ‘함께할 바보’를 또 구하고 서로를 보며 위안을 삼는다.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지독하게 방황하던 때, 내 곁에서 함께 방황해 주던 동생이 있었다. 그 친구는 내가 보기에 여전히 그 긴 방황을 이어가고 있다.
왜 우리는 그 헛된 기다림 속에서 서로를 놓지 못했을까? 그냥 무서우니까.
“We’re doomed.”
이대로 가다간 파멸하고 말 거라는 걸 영혼 깊은 곳에서는 뼈저리게 알지만, 그 차가운 현실을 홀로 직면할 용기가 도무지 나지 않으니까. 그래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현실을 도피하고 위안 삼았던 것이다.
포조와 럭키, 그리고 착취의 굴레

기다림의 허무함 속에 불쑥 끼어드는 포조와 럭키의 기괴한 관계도 마찬가지다. 목에 밧줄이 매인 노예와 채찍을 쥔 주인.
인간은 본래 땀 흘려 일함으로써 보람을 느끼고 생존할 수 있는 존재다. 하지만 생존 이상의 것을 탐내고, 잉여를 저장하고 축적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인간은 끝없는 불행의 쳇바퀴에 갇혀버렸다. 더 많은 돈, 더 넓은 땅, 더 높은 명예, 더 많은 재물…
사실 그것들은 삶의 진짜 본질이 아니다. 우리 삶에서 진짜 중요한 건 결국 ‘고도’를 만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 움직여야 하는 것인데, 정작 중요하지도 않은 잉여와 탐욕에 갇혀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하며 서로를 착취하고 착취당하는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그런 사이클에 스스로를 몰아넣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참 서글프게 다가왔다.
“움직이지 않는다” vs “나는 떠났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언제 봐도 지독할 만큼 강렬하다.
블라디미르: “그럼 갈까?”
에스트라공: “가자.”
(그러나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떠나자고 말로는 합의해 놓고, 끝끝내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는 두 사람.
이 대목에서 문득 대학원을 졸업하던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졸업, 대학교 입학, 졸업, 그리고 대학원 입학과 졸업까지… 단 한 틈도 쉬지 않고 앞만 보며 달렸었다. 그런데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취업이라는 다음 관문 앞에 섰을 때, 내 안에서 형언할 수 없는 거대한 위기감이 번개처럼 내리쳤다.
“여기서 아무 생각 없이 바로 취업해 버리면, 딱 저 <고도를 기다리며> 사람들처럼 난 ㅈ된다…”
이대로 쉬지 않고 사회라는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타 버리면, 나는 내 삶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평생을 쏟아부으며 쳇바퀴 속에서 늙어가겠구나 싶었다. 그건 결코 내 삶의 진짜 목적일 수 없었다.
그래서 졸업 직후, 모든 것을 내려두고 홀로 세계일주를 떠났다.
“도대체 사람은 왜 살까?” 그 본질적인 물음의 답을 찾기 위해서.
그 길 위에서 온몸으로 부딪치며 배운 것은,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고 수많은 삶의 모양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남들이 정해놓은 쳇바퀴 속에서 그렇게 아둥바둥 쫓기듯 살 필요가 없다는 것, 세상이 중요하다고 외치는 것들이 내 영혼에는 결코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그때 알았다. 고도는 가만히 자리에 주저앉아 세월을 죽이며 기다린다고 찾아오는 게 아니라는 것을. 방향을 돌려 아예 고도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든, 혹은 그 헛된 망상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지든, ‘결단하고 움직이는 행위’가 있어야 비로소 삶의 진짜 진실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지금, 나의 ‘고도’는 무엇인가
나는 이미 인생에서 가장 큰 고도, 아니 진짜 고도(신앙과 하나님)를 만났다고 믿는다. 내 삶의 절대적인 닻은 이미 내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연약한 인간이기에 요즘 내 마음 한구석에서 은연중에 바라고 꿈꾸는 고도가 있다.
그것은 바로 “행복한 일터와 마음 맞는 동료들”, 그리고 “온전히 하나 되는 건강한 신앙 공동체”다.
이 불완전하고 깨어진 세상 속에서 그런 무결점의 일터나 완벽한 공동체 따위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머리로는 너무나 잘 안다. 안 올 걸 알면서도, 현실에서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바라고 만들고 싶어지는 마음.
어쩌면 안 될 걸 알면서도 기어코 품게 되는 그 아련한 소망이야말로, 이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이 저마다 가슴속에 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작고 슬픈 ‘고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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