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3] <고도를 기다리며> 후기, 사뮈엘 베케트 – 안 올 걸 알면서도 꿈꾸는 저마다의 고도

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표지
사뮈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블라디미르: “그럼 갈까?”
에스트라공: “가자.”
(그러나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 사뮈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결말 중에서

솔직히 처음 책장을 넘겼을 땐 좀 ‘엥?’ 했다.
연극 무대에서 배우들의 침묵과 공기를 눈앞에서 보며 접했다면 시작부터 “오… 꽤 심오한데?” 하며 여운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활자로만 읽어 내려가다 보니, 뜬금없는 대사들의 나열에 “아니 이게 대체 뭐야 ㅋㅋㅋ” 하며 띠용했던 게 솔직한 첫 느낌이었다.

그래서 도대체 이게 무슨 작품인가 조사를 좀 해보고 나서야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이른바 ‘부조리극(Theatre of the Absurd)’.
이치에 맞지도 않고, 개연성도 없는 헛소리와 바보 같은 만담의 연속. 그런데 그 공허하고 허무한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다 보니 문득 서늘한 질문 하나가 가슴에 쿵 하고 내려앉았다.

“어쩌면 우리네 삶에도 이런 이치에 안 맞는 허무하고 바보 같은 모습들이 가득하지 않은가?”


‘함께할 바보’와 파멸의 회피

절대로 오지 않을 이상향을 기다리며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아쉬워하고, 목매고, 서로 착취하고 착취당하는 것. 그것이 어쩌면 우리 인간들의 삶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책을 읽는 내내 한편으로는 철학자 니체가 떠올랐다.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초인이 되기 위해, 혹은 누군가가 초인이 되어 자신을 구원해 주기를 바라다가 끝내 미쳐서 생을 마감했던 니체의 비극이 겹쳐 보였다.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고도’가 있지 않을까.
완벽한 배우자, 흠결 없이 온전해진 나 자신, 이상적인 일터와 제도, 혹은 손에 잡히지 않는 영원한 행복감. 우리는 당연히 이루어지지 않을 각자만의 고도를 목 빠지게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도는 끝내 오지 않을 것임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면서도, 막상 이 자리를 박차고 떠나기엔 너무나 아쉽고 두려워서 기어코 ‘함께할 바보’를 또 구하고 서로를 보며 위안을 삼는다.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지독하게 방황하던 때, 내 곁에서 함께 방황해 주던 동생이 있었다. 그 친구는 내가 보기에 여전히 그 긴 방황을 이어가고 있다.
왜 우리는 그 헛된 기다림 속에서 서로를 놓지 못했을까? 그냥 무서우니까.
“We’re doomed.”
이대로 가다간 파멸하고 말 거라는 걸 영혼 깊은 곳에서는 뼈저리게 알지만, 그 차가운 현실을 홀로 직면할 용기가 도무지 나지 않으니까. 그래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현실을 도피하고 위안 삼았던 것이다.


포조와 럭키, 그리고 착취의 굴레

사뮈엘 베케트
사뮈엘 베케트 (Samuel Beckett, 1906~1989)

기다림의 허무함 속에 불쑥 끼어드는 포조와 럭키의 기괴한 관계도 마찬가지다. 목에 밧줄이 매인 노예와 채찍을 쥔 주인.

인간은 본래 땀 흘려 일함으로써 보람을 느끼고 생존할 수 있는 존재다. 하지만 생존 이상의 것을 탐내고, 잉여를 저장하고 축적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인간은 끝없는 불행의 쳇바퀴에 갇혀버렸다. 더 많은 돈, 더 넓은 땅, 더 높은 명예, 더 많은 재물…

사실 그것들은 삶의 진짜 본질이 아니다. 우리 삶에서 진짜 중요한 건 결국 ‘고도’를 만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 움직여야 하는 것인데, 정작 중요하지도 않은 잉여와 탐욕에 갇혀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하며 서로를 착취하고 착취당하는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그런 사이클에 스스로를 몰아넣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참 서글프게 다가왔다.


“움직이지 않는다” vs “나는 떠났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언제 봐도 지독할 만큼 강렬하다.

블라디미르: “그럼 갈까?”
에스트라공: “가자.”
(그러나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떠나자고 말로는 합의해 놓고, 끝끝내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는 두 사람.
이 대목에서 문득 대학원을 졸업하던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졸업, 대학교 입학, 졸업, 그리고 대학원 입학과 졸업까지… 단 한 틈도 쉬지 않고 앞만 보며 달렸었다. 그런데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취업이라는 다음 관문 앞에 섰을 때, 내 안에서 형언할 수 없는 거대한 위기감이 번개처럼 내리쳤다.

“여기서 아무 생각 없이 바로 취업해 버리면, 딱 저 <고도를 기다리며> 사람들처럼 난 ㅈ된다…”

이대로 쉬지 않고 사회라는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타 버리면, 나는 내 삶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평생을 쏟아부으며 쳇바퀴 속에서 늙어가겠구나 싶었다. 그건 결코 내 삶의 진짜 목적일 수 없었다.

그래서 졸업 직후, 모든 것을 내려두고 홀로 세계일주를 떠났다.
“도대체 사람은 왜 살까?” 그 본질적인 물음의 답을 찾기 위해서.

그 길 위에서 온몸으로 부딪치며 배운 것은,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고 수많은 삶의 모양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남들이 정해놓은 쳇바퀴 속에서 그렇게 아둥바둥 쫓기듯 살 필요가 없다는 것, 세상이 중요하다고 외치는 것들이 내 영혼에는 결코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그때 알았다. 고도는 가만히 자리에 주저앉아 세월을 죽이며 기다린다고 찾아오는 게 아니라는 것을. 방향을 돌려 아예 고도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든, 혹은 그 헛된 망상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지든, ‘결단하고 움직이는 행위’가 있어야 비로소 삶의 진짜 진실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지금, 나의 ‘고도’는 무엇인가

나는 이미 인생에서 가장 큰 고도, 아니 진짜 고도(신앙과 하나님)를 만났다고 믿는다. 내 삶의 절대적인 닻은 이미 내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연약한 인간이기에 요즘 내 마음 한구석에서 은연중에 바라고 꿈꾸는 고도가 있다.
그것은 바로 “행복한 일터와 마음 맞는 동료들”, 그리고 “온전히 하나 되는 건강한 신앙 공동체”다.

이 불완전하고 깨어진 세상 속에서 그런 무결점의 일터나 완벽한 공동체 따위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머리로는 너무나 잘 안다. 안 올 걸 알면서도, 현실에서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바라고 만들고 싶어지는 마음.

어쩌면 안 될 걸 알면서도 기어코 품게 되는 그 아련한 소망이야말로, 이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이 저마다 가슴속에 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작고 슬픈 ‘고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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