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아무래도 인간을 단념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익살이라는 가는 실로 간신히 인간과 연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중에서
책을 덮고 나서 가장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던 구절이다.
혼자 있고 싶어 하면서도 결국 타인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는 모순. 타인이 두려워 도망치고 숨고 싶으면서도, 결코 인간을 단념하지 못하는 지독한 갈망. 사람은 참 어쩔 수 없이 이중적이다.
내면의 꺼내기 힘든 역겨움, 그리고 정직함
<인간실격>의 주인공 요조는 충격적일 정도로 나약하고 찌질하다.
술과 담배, 여자에 빠져 방황하고, 유부녀와 동반자살을 기도했다가 혼자만 살아남는다. 불한당처럼 인생을 낭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자신의 고상함을 내세운다.
참 한심하고 비겁한 삶인데, 이상하게도 책을 읽는 내내 그 외롭고 애처로운 마음이 고스란히 이해가 됐다.
사람은 다 그렇지 않은가. 누구나 내면에 겉으로 꺼내놓기 힘든 역겨움과 어둠을 품고 산다. 그것을 사회적 기준에 맞춰 얼마나 안으로 숨기고 절제하느냐에 따라 겉보기 삶의 모습이 결정될 뿐이다. 겉으로는 고상하고 깨끗한 척 위선을 떨지만 속은 곪아있는 사람들보다, 차라리 자신의 밑바닥과 나약함을 포장하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요조가 더 애처롭게 다가왔던 이유다.
선악의 구분을 떠나, 나는 안과 밖이 같은 정직한 사람이 좋다. 요조는 비록 파멸했을지언정, 적어도 자신 안의 위선과 공포 앞에서 거짓으로 자기를 포장하지 못한 가장 정직하게 아파했던 인간이었다.
예술가의 파멸과 우리가 지고 있는 빚

예술성을 가진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일반인들보다 훨씬 더 깊고 파멸적인 길로 걸어 들어가는 경향이 있다. 다자이 오사무 역시 평생 다섯 번의 자살을 기도했고, 약물에 중독되었으며, 결국 서른여덟의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평범하고 안전한 일상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쩌면 이런 예술가들이 스스로를 불태우며 남긴 파멸의 궤적을 통해 자신 내면의 왜곡된 욕망과 억눌린 어둠을 대리 해소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들의 상처와 비극에 일종의 빚을 지고 살아가는 셈이다.
요조가 완전히 무너져 내린 결정적인 트리거도 결국 ‘순수한 사랑의 붕괴’였다. 추악한 자신을 조건 없이 감싸주던 둘째 아내 요시코의 신뢰는 그에게 유일한 아가페적인 안식처였다. 그러나 그 순수한 신뢰마저 짓밟히고 무너졌을 때, 그는 더 이상 버텨낼 영혼의 피난처를 찾지 못했다.
삶이라는 아슬아슬한 줄타기, 그리고 초월적 존재
이 책은 어떤 도덕적인 교훈이나 주제를 주는 책이 아니다. 영화 <어쩔수가없다>처럼, 그저 우리 마음속 깊은 곳의 역겨움을 정직하게 돌아보게 하고, 벼랑 끝으로 내몰린 한 인간의 처절한 삶에 깊이 공감하게 만드는 책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왜 이 작품이 시대를 뛰어넘어 지금까지 읽히는 ‘클래식’인지 알 것 같았다.
요즘 삶에 대해 부쩍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삶이라는 것은 참 아슬아슬한 줄타기 같다.
좋은 삶, 성실하고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것은 어찌 보면 참 단순하고 쉬운 일처럼 보인다. 주어진 하루를 묵묵히 살아가면 되니까.
하지만 그 선을 넘어가 버리는 것,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지는 결심을 하거나 상황에 의해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것 또한 정말로 한순간이다. 사람이 무너지는 데에는 그리 거창한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 균형을 잃는 것도, 줄을 놓아버리는 것도 찰나의 순간이다.
요조에게는 그 줄 위에서 중심을 잡아줄 존재가 없었다. 떨어졌을 때 다시 그 줄을 잡고 올라탈 수 있게 해줄 손길도 없었다.
이 위태로운 줄타기 같은 세상 속에서, 연약한 내가 매일 흔들리면서도 중심을 지킬 수 있는 힘, 설령 발을 헛디뎌 떨어지더라도 다시 줄 위에 설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인간 자신의 의지가 아니다.
그것은 오직 삶의 중심을 붙들어 주시는 초월적인 존재—나에게는 예수와 하나님—밖에는 없다.
내가 잘나서 줄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은혜가 붙들어 주고 계시기에 오늘도 이 위태로운 줄 위를 한 걸음씩 걸어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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